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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악몽

마곰 · 2026년 10월 15일

서걱서걱, 병원 자동문 밑에서 모래 밀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그 소리는 어금니 사이에 낀 모래알처럼 귓속을 긁었다. 눈을 털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신발에서 검은 물이 흘러내려 바닥에 얼룩을 그렸다. 나는 젖은 자리를 피해 케이크 상자를 고쳐 들었다. 얇은 골판지 손잡이가 손가락 마디를 파고들었다.

“로비는 오 층이야. 일 층 게이트로 들어와서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오면 돼.”

한 시간쯤 전, 전화 너머에서 동현은 그렇게 말했다. 병실은 4층인데 로비가 5층이라니 이상했지만, 언덕에 지은 병원이라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빙판길에서 미끄러져 정강이뼈에 금이 가고 무릎이 좀 쓸렸다고 했다. 깁스하고 며칠 누워 있으면 된다고. 그러니 오늘도 바쁘면 굳이 오지 않아도 된다고.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의자에 걸쳐 두었던 외투를 집어 들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나는 같은 약속을 세 번 했다. 월요일에는 일이 늦게 끝났고, 수요일에는 눈이 왔다. 금요일에는 병원 앞까지 갔다가 면회 시간이 지났다는 핑계로 돌아섰다. 사실 그날은 출입문에 붙은 시간표를 제대로 읽지도 않았다.

대학 동기 녀석이 넘어져 다리 좀 다쳤다는데, 얼굴 보러 가는 일쯤은 조금 미뤄도 되는 줄 알았다. 미뤄 둔 약속들은 외투 주머니 속 영수증처럼 구겨진 채 쌓여 갔고, 나는 그것을 한 번도 펴 보지 않았다.

병원으로 오는 길에 들른 빵집에는 작은 케이크가 하나 남아 있었다. 하얀 생크림 위에 설탕으로 빚은 집 한 채를 얹고, 지붕에는 가루 설탕을 눈처럼 소복이 뿌려 둔 것이었다. 진열장 불빛 아래서 그 작은 집은 창문까지 노랗게 빛나 보였다.

계산을 마치고 상자 뚜껑이 닫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생각이 났다. 동현이는 생크림을 좋아하지 않았다. 생일이면 늘 포크 끝으로 크림을 걷어 내고 빵만 먹던 놈이었다.

“초는 몇 개 드릴까요?”

점원이 물었을 때 나는 잠깐 망설였다. 생일도 아닌데 초를 달라는 것이 멋쩍었다. 그래도 불을 하나쯤 켜 놓고 마주 앉아 있으면, 병실이 조금은 덜 병실 같아지지 않을까 싶었다.

“두 개 주세요.”

하나는 동현이, 하나는 내가 끄면 될 것이었다. 점원은 초 두 개와 작은 플라스틱 칼을 비닐봉투에 담아 상자 옆면에 테이프로 붙여 주었다. 찌익, 테이프 끊기는 소리가 텅 빈 가게 안에 유난히 크게 울렸다.

빵집에서 병원까지는 큰길 하나만 건너면 됐다. 횡단보도 앞에서 상자가 기울지 않게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신호를 기다렸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헤드라이트 불빛이 길게 번져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넓은 로비가 펼쳐졌다. 창밖은 벌써 캄캄했고, 소파마다 외투를 무릎에 덮은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었다. 천장 가까이 매달린 커다란 은빛 공에 내 모습이 작고 둥글게 비쳤다.

안내 데스크에는 빨간 모자를 쓴 직원이 앉아 있었다. 모자 끝의 흰 방울이 한쪽 어깨에 얌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데스크 옆에는 면회 시간표가 붙어 있었다. 오전 열한 시 반, 저녁 일곱 시 반. 하루 두 번뿐이었다. 이번에는 끝까지 읽었다.

“4층 병실에 가려고요.”

“1층에서 다시 타셔야 해요.”

직원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방금 1층에서 올라왔다고 말하려다, 설명이 길어질 것 같아 그만두었다. 이런 곳에서는 길을 아는 사람의 말을 따르는 편이 빠르다. 얼른 올라가 상자를 내려놓고, 언 손부터 씻고 싶었다.

1층으로 내려가 버튼판을 들여다보았다. 3 다음에는 4 대신 F가 있었다. 병원은 4를 꺼린다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F를 꾹 눌렀다.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을 때, 빨간 모자의 직원이 아까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잘못 눌렀나 싶어 층수 표시를 올려다보았다. 5층이었다. 직원은 볼펜 끝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병동은 1층에서요.”

나는 계단을 찾았다. 초록색 비상구 표시 아래 철문을 밀자 찬 공기가 얼굴에 훅 끼쳤다. 콘크리트 계단에 내 발소리만 텅텅 울렸다.

한 층을 내려가자 벽에 커다란 숫자 4가 칠해져 있었다. 엘리베이터에는 없던 숫자였다.

손잡이가 뻑뻑해 어깨로 문을 밀었다. 문 너머에는 소파와 은빛 공, 그리고 한쪽으로 기운 흰 방울이 있었다.

직원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아직 못 가셨어요?”

나는 대답 대신 상자를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옮겼다. 손가락에 눌린 자국이 하얗게 남았다가 천천히 붉어졌다.

직원 뒤의 벽시계는 여덟 시 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처음 이 데스크 앞에 섰을 때도 그 시각이었던 것 같았다. 초침이 움직이는지 보려고 한참을 올려다보았지만, 눈이 시려 고개를 돌렸다.

동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는 동안, 침대에 누워 팔을 뻗어 협탁 위 전화기를 더듬고 있을 모습이 떠올랐다. 옆 침대 사람에게 부탁해도 될 일을, 동현은 언제나 제 몸을 움직여 했다.

몇 해 전 내가 독감으로 앓아누웠던 날에도 그랬다. 편의점 죽이랑 이온음료를 문고리에 걸어 둘 테니 절대 나오지 말라던 목소리. 옮으면 나 회사 잘린다, 하던 쉰 웃음. 바스락거리던 비닐봉지 소리. 겨우 일어나 문을 열었을 때는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만 남아 있었다.

“왔냐?”

잠긴 목소리였다.

“응. 바로 아래야.”

나는 직원이 듣지 못하게 몇 걸음 물러섰다. 아래인지 위인지도 모르면서, 그런 말은 참 쉽게도 나왔다.

“케이크 샀는데, 생크림이다.”

수화기 너머에서 동현이 작게 웃었다.

“긁어 먹으면 되지. 어차피 단 거 먹지 말래.”

별일 아니라는 듯한 그 말에 나는 괜히 상자 옆면의 비닐봉투를 만지작거렸다. 봉투 속 플라스틱 칼은 손톱만큼 얇고 무뎌 보였다. 저걸로 크림을 말끔히 걷어 낼 수 있을까. 아직 병실 문도 찾지 못한 주제에, 그런 것부터 마음에 걸렸다.

“금방 갈게.”

전화를 끊고 1층 버튼을 눌렀다. 닫히는 문틈으로 직원이 볼펜을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아래를 가리키는 것인지, 나를 부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은빛 공에 작고 둥글게 비치던 내 얼굴도 그 너머로 사라졌다.


1층 엘리베이터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 옆 화분에 금색 리본이 묶여 있었고, 흙 위에는 담배꽁초 하나가 반쯤 박혀 있었다. 누가 보고 얼른 숨겨 놓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 작은 잘못이 오히려 반가웠다. 사람이 오가는 곳에는 으레 그런 것이 있기 마련이었다.

F 버튼을 누르고 손을 뗀 뒤에도 불이 켜져 있는지 확인했다. 이번에는 문 바로 옆에 붙어 서 있었다.

뒤따라 들어온 남자 둘이 8층을 눌렀다. 한 사람은 목발을 짚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이 그의 배낭과 편의점 봉지를 대신 들고 있었다. 봉지 안에서 캔끼리 부딪는 소리가 났다.

“야, 문 좀 잡아.”

“잡고 있잖아. 다리 하나 없는 사람처럼 굴지 마라.”

목발 짚은 쪽이 투덜대며 벽에 기댔다. 다른 쪽은 그 어깨에 묻은 눈을 손등으로 툭툭 털어 주었다. 좁은 칸 안에 젖은 패딩 냄새가 번졌다.

동현과 처음 원룸을 얻던 겨울이 떠올랐다. 졸업은 했는데 둘 다 붙은 데가 없었다. 보증금을 반씩 내면 학교 앞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동네에 방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가스비를 아끼느라 전기장판 하나를 가운데 깔고, 각자 끝에 다리만 걸치고 잤다. 동현은 코를 골았고 나는 이를 갈았다. 아침이면 서로 네가 더 시끄러웠다고 우겼다.

면접이 있는 날이면 하나뿐인 정장을 돌려 입었다. 동현이 나보다 어깨가 넓어서, 내가 입으면 소매가 손등을 반쯤 덮었다. 넥타이는 늘 동현이 매 주었다. 제 목에 먼저 매어 보고, 고리를 느슨하게 빼서 내 머리에 씌워 주었다.

크리스마스에는 둘 다 약속이 있는 척했다. 누구 하나 먼저 들어오면 다른 사람 몫의 컵라면 물을 올려놓았다. 냉장고에는 소주 두 병과 참치 캔이 있었다. 결국 둘 다 아홉 시도 안 돼 들어와 있었다.

그때는 그렇게 돌아오면 되는 방이 늘 있을 줄 알았다.

그 시절 소주는 일주일에 두 병이었다. 각자 회사에 들어가고 나서 동현이 보내는 새벽 메시지에는 오타가 늘었다. 나는 그것을 읽고, 아침에 답했다.

목발을 고쳐 짚던 남자가 몸을 틀었다. 그 팔꿈치가 내 앞을 스치더니 F 버튼을 눌렀다. 작은 소리와 함께 불이 꺼졌다.

“저기, 그거 제가 누른 건데요.”

“아, 죄송합니다.”

남자가 손을 뻗었지만 나는 이미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손끝에서 켜졌다 꺼졌다 하는 불 때문에 몇 번을 눌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층수 표시는 3을 지나 5로 바뀌었다.

또 그 직원 앞에 서게 될까 봐 나는 서둘렀다. 8을 찾았지만 5 옆에는 7이 있었다. 어디든 먼저 내려서 한 층씩 걸어 내려오면 될 일이었다.

7 층 버튼을 누르자 봉지를 든 남자가 내 손목을 붙들었다.

“거기 누르시면 안 되는데.”

엘리베이터가 덜컹, 하고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상자가 배에 부딪히고 안에서 초 봉투가 바스락거렸다. 나는 무릎을 굽혀 버텼다.

위로 올라가는 중인데도 몸이 자꾸 옆으로 쏠리는 것 같았다. 속에 든 것들만 아직 아래층에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7층은 별관 연결 통로예요. 내리면 한참 돌아와야 돼요.”

남자가 말했다. 나무라기보다 이미 놓친 버스를 설명하는 말투였다. 나는 내 손목에 남은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에 눈 한 알이 붙어 있었다. 실내가 이렇게 따뜻한데도 좀처럼 녹지 않았다.

“저는 4층만 가면 되는데요.”

띵, 문이 열렸다. 양쪽 벽이 통유리로 된 긴 통로가 앞에 놓여 있었다. 두 남자는 우리도 별관 간다며 먼저 내렸다.

나는 돌아서서 닫힘 버튼을 눌렀다. 버튼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문 옆에 ‘점검 중’이라고 쓴 종이가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방금까지 타고 온 엘리베이터였다.

나는 상자를 끌어안고 통로로 걸어 나갔다. 천장에 매달린 안내판에는 화살표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 별관 · 장례식장. 화살표는 내가 가는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손바닥을 대자 유리가 바람에 미세하게 떨렸다. 저 아래 도로에는 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고, 건너편 건물 옥상마다 크리스마스트리가 서 있었다. 트리 꼭대기의 별은 어느 것도 빛나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본관의 흰 창문들이 빽빽했다. 어느 줄이 4층인지 세어 보는 동안, 도시의 불빛들이 유리 위의 내 얼굴로 겹쳐 흘렀다.

통로 중간에 비상 호출 버튼이 있었다. 누르자 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병원 이름과 동현의 병실 번호를 말했다. 끝까지 들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사정을 덧붙이려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로비는 5층입니다.”

나는 버튼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스피커 안에서 안내가 끝난 뒤에도 손끝이 계속 떨렸다.

통로 저쪽 끝에서 두 남자가 멀어지고 있었다. 목발이 미끄러질 때마다 다른 쪽이 말없이 팔꿈치를 받쳤다.

주머니에서 전화가 울렸다. 동현이었다.

“어디쯤이냐?”

나는 창밖을 보았다. 건너편 건물의 창문들이 하나씩 켜지고 있었다. 저 불빛 가운데 아무 곳이나 가리키며 여기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돌아가고 있어.”

동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이불을 끌어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초는 사 왔냐?”

상자에 붙은 봉투를 만져 보았다. 단단한 초 두 개가 손끝에 나란히 걸렸다.

“응. 두 개.”

“잘했네.”

동현이 숨을 고르고 덧붙였다.

“여기는 불이 좀 어둡다.”

나는 더 묻지 못했다. 어느새 유리창에 비친 케이크 상자가 환하게 보였다.

바깥이 어두워져서인지, 상자 안쪽이 밝아져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별관 로비에는 눈에 젖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긴 의자 밑으로 물이 흘러 타일 이음새를 따라 모였다. 두 남자는 통로 끝의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랐다. 나는 본관으로 돌아가는 길을 물으려고 뒤따라갔지만, 목발 끝이 문틈에 걸렸다 빠지는 사이 문이 닫혔다.

지하로 내려가면 본관행 셔틀버스 정류장이 있다는 표지판이 있었다. 나는 케이크를 수평으로 받쳐 들고 지하 통로를 걸었다.

천장의 형광등은 사람이 지나가면 켜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밟을 자리가 아니라, 이미 지나온 바닥이 한 박자 늦게 환해졌다. 센서가 고장 났겠거니 했다. 다시 앞을 보면 내 발끝부터 어두웠다.

통로 끝의 출입 통제 데스크에는 작은 전기난로가 켜져 있었다. 경비원이 두 무릎 사이에 손을 넣고 앉아 있다가 나를 보았다. 유리 밑으로 입을 가까이 대자 먼지 타는 냄새가 났다.

“면회 왔는데요. 방문증 좀 주세요.”

“몇 층이세요?”

나는 4층이라고 말했다. 경비원은 일어서지도 않고 방문증 한 장을 밀어 주었다. 스티커에 ‘5F 로비’라고 찍혀 있었다. 잘못 나왔다고 하자, 면회객은 로비에서 다시 확인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거기서 내려왔는데요.”

“그러니까 돌아가시는 거죠.”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해서 나는 방문증을 집었다.

뒤에 선 사람들이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보니 모두 무언가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귤 상자와 꽃다발, 알루미늄 포일을 덮은 접시. 한 노인은 빨간 내복을 포장도 하지 않고 두 팔에 걸쳐 들었다. 소매가 무릎 아래로 처져 있었다.

나는 방문증을 외투 주머니에 넣다가 초 봉투가 뜯어진 것을 발견했다. 상자를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봉투 안에 남은 초는 한 개였다. 다른 하나를 언제 어디서 흘렸는지 알 수 없었다.

잠깐 뚜껑을 열어 보았다. 설탕 집은 옆으로 기울어 있었고, 흰 지붕 한쪽이 생크림에 잠겨 있었다. 녹은 설탕이 상자 바닥을 적신 모양인지, 귀퉁이가 손끝에 축축하게 묻어났다.

나는 집을 바로 세우려다 말았다. 만지면 그대로 무너질 것 같았다.

정류장에서 셔틀버스를 탔다. 기사는 본관이 바로 다음이라고 했다. 버스는 주차장을 한 바퀴 크게 돌더니 별관 정문 앞에 다시 섰다. 본관 앞은 공사 중이라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했다.

나는 앞문 옆에 서서 열린 문으로 눈이 들이치는 것을 보았다. 뒤의 승객들이 일제히 일어나 내 등을 밀었다.

그 뒤로는 걷고 뛰는 일이 뒤섞였다. 공사 가림막을 따라 돌았고, 주차 타워 계단을 올랐다가 내려왔다.

길을 물으면 사람들은 망설이지 않고 방향을 짚어 주었다. 그쪽으로 갈 때마다 본관은 주차 타워 뒤로, 장례식장 간판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나 있었다. 나중에는 길을 묻기도 전에 사람들이 손을 들었다.

상자 손잡이가 끊어진 것은 그때였다. 나는 무릎을 굽혀 상자를 받았다. 옆면이 눌리면서 안에서 무언가 툭,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다시 세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두 팔로 상자 밑을 감싸고 일어섰다. 동현에게 보여 주기 전에 새로 사면 될 것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많이 멀어?”

동현의 목소리가 낮아져 있었다. 나는 이제 막 모퉁이를 돌아 병원 간판을 발견한 사람처럼, 숨을 골라 말했다.

“다 왔어.”

“그 말 아까도 했다.”

동현은 웃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를 탓하는 기색도 없었다. 나는 흰 입김이 화면 위로 번졌다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동현은 내게 오라는 말을 한 번도 먼저 하지 않았다. 이번 주에도, 내가 원룸을 나가던 날에도 그랬다.

먼저 정규직이 된 것은 나였고, 나는 회사 근처로 방을 옮겼다. 계약 기간이 반년 남은 방의 월세는 동현이 혼자 냈다. 짐을 다 싣고 내려온 내게 동현은 장갑 챙겼느냐고만 물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지도 않고 있다고 했었다.

“춥지?”

동현이 물었다.

“괜찮아. 너는.”

“나는 좀 춥다. 아까부터 열이 나네. 간호사가 피 뽑아 갔어. 별거 아니래.”

다리에 금이 간 사람이 왜 열이 나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손 시리면 잠깐 내려놔. 케이크.”

나는 젖은 상자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바닥에 내려놓으면 다시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상자를 지키느라 이렇게 늦는 건지, 상자를 들고 있어야 아직 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럼 나 조금만 잘게.”

“자지 마.”

내 목소리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렸다. 모두 잠깐 나를 보더니, 다시 같은 쪽을 가리켰다.

“왜?”

나는 금방 간다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동현이 대답을 기다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느린 숨소리가 들렸다. 그 숨 사이에 무슨 말을 넣어야 할지 몰라 나는 전화기를 뺨에 붙인 채 서 있었다.

멀리서 캐럴이 흘러나왔다. 기쁘다 구주. 노래는 거기서 끊겼다가 같은 말로 다시 시작했다.

전화가 끊긴 뒤에도 나는 한참 귀에서 기계를 떼지 못했다. 화면에는 여덟 시 십 분이 떠 있었다.


눈을 털려고 내려다보니 구두 끝이 말라 있었다.

바닥도 젖어 있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은빛 공과 빈 소파들이 보였다. 나는 다시 병원 5층에 서 있었다.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멀리서 들리던 캐럴이 천장 스피커 안으로 들어가 낮게 울리고 있었다.

안내 데스크에는 빨간 모자만 놓여 있었다. 나는 케이크를 그 옆에 내려놓고 손바닥을 폈다.

오래 쥐었던 손은 빈손이 되고 나서야 떨렸다.

복도 끝의 비상구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나는 상자를 두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숫자 4 아래에 작은 전구가 달려 있었다. 이번에도 같은 로비가 나오면, 직원이 돌아올 때까지 앉아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 너머에는 병실 복도가 있었다. 벽 아래로 낮은 불빛이 이어졌다. 간호사실 의자에는 카디건이 걸려 있었고, 뚜껑을 연 보온병에서 김이 조금씩 났다.

나는 그 김을 보고 걸음을 늦추었다. 누군가 방금까지 여기 있었다는 것이 고마웠다.

412호 문에 동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종이 끝이 들떠 있어 손가락으로 눌러 주었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창가 침대는 비어 있었다. 시트를 걷어 낸 매트리스가 형광등 아래 맨살처럼 드러나 있었다. 침대 난간에 깁스할 때 쓰는 붕대 뭉치가 걸려 있었다. 협탁 위에는 동현의 휴대전화와 뚜껑을 덮지 않은 혈당 측정기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었다. 화면이 켜지면서 읽지 않은 메시지들이 위아래로 쌓였다. 보낸 사람은 모두 나였다.

미안 오늘 야근이라 못 갈 듯. 월요일이었다.

눈 너무 와서 내일 갈게. 수요일이었다.

면회 시간 지났더라. 내일 꼭. 금요일이었다.

맨 아래에 오늘은 꼭 간다, 가 있었다. 읽음 표시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 화면이 다시 꺼질 때까지 손을 대지 못했다. 그 문장들을 쓸 때마다 나는 적어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늉은 했었다.

옆 침대의 커튼 너머에서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응. 지금 갈게.”

피곤하고, 조금 다급하고, 충분히 그럴듯한 목소리였다. 내 목소리와 많이 닮아 있었다. 나는 두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 없는 손이었다.

복도 끝에서 슬리퍼 끄는 소리가 났다. 나는 동현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그 이름을 부르면 커튼이 걷힐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발소리는 잠깐 멎었다.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서 있는 것처럼.

계단으로 돌아 나왔을 때에는 숨이 차올랐다. 5층 데스크에서 상자를 다시 들었다. 밑바닥이 젖어 있어 팔뚝에 서늘한 것이 묻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나는 몸을 밀어 넣고 1층을 눌렀다. 버튼의 불이 켜지는 것을 이번에는 확인하지 않았다.

내려가는 동안 문 바깥에서 두 번, 똑똑 소리가 났다.

동현이 원룸 문 앞에서 하던 버릇이었다. 열쇠가 있어도 먼저 두드리고 잠깐 기다렸다. 내가 자는지, 아직 깨어 있는지 살피느라 그랬었다. 나는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문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띵, 도착음이 길게 늘어지더니 일정한 간격으로 끊어졌다. 띠, 띠. 그 소리에 눈을 떴다.

아침이었다. 커튼 틈으로 들어온 볕이 이불 끝을 가늘게 덮고 있었다. 나는 손을 폈다. 손바닥에는 아무 자국도 없었다. 베개 옆의 휴대전화를 집었다.

12월 25일이었다.

부재중 전화가 열한 통 와 있었다. 맨 위에 동현 어머니의 문자가 있었다.

동현이가 어젯밤에 갔다. 다친 데로 균이 들어가서 손쓸 틈이 없었다는구나. 장례식장은 그 병원 지하다. 연락이 안 돼서 문자 남긴다.

나는 그 문자를 몇 번이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당뇨가 있었다는 것도, 술을 끊지 못했다는 것도 나는 문자 속 몇 글자로 처음 알았다. 오타가 늘어 가던 새벽 메시지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목구멍이 턱 막혔다. 지난밤의 그 긴 길이 꿈이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손가락이 저절로 동현의 번호를 눌렀다. 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호음을 듣고 싶었다.

“깼냐?”

동현이 먼저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불을 걷고 일어앉았다. 맨발이 바닥에 닿았는데 따뜻하지 않았다. 젖은 타일을 밟은 것처럼 발가락 사이가 서늘했다.

“너, 지금 어디야.”

동현이 대답하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비닐이 바스락거렸다.

“나도 이제 내려가 보려고.”

동현이 말했다.

“계속 네가 안 와서. 너 오다가 다쳤다며. 그 큰길에서. 5층에 있다길래, 몇 번 올라가 봤다.”

나는 열린 방문을 바라보았다. 문밖에 환한 불빛이 있었다. 창문 없는 복도가 내 방보다 훨씬 밝았다.

환자복을 입은 동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젖은 케이크 상자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나는 그 손부터 보았다. 오래 쥐고 있느라 하얗게 눌린 손가락들이 눈에 들어왔다.

상자 밑을 받아 주려고 몸을 일으켰다. 몸이 이불에 묶인 듯 무거웠다. 동현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상자를 받쳐 들고, 다른 손을 뻗어 방문 옆의 1층 버튼을 눌렀다.

띠, 띠. 어디선가 기계음이 일정하게 이어졌다. 나는 채 일어서지 못한 자세로 동현을 보았다.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