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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박새

동박새

마곰 · 2026년 10월 15일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장면에는 소리가 하나밖에 없다. 툭. 무겁고 부드러운 것이 젖은 땅에 내려앉는 소리.

여수의 겨울은 좀처럼 눈을 허락하지 않는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짜고 축축해서, 하늘이 아무리 낮게 내려앉아도 대개는 진눈깨비로 끝나고 만다. 그런데 그해 십이월에는 눈이 왔다. 병원 화단에, 주차장 가장자리에, 동백나무 아래에 얇게 깔렸다. 언덕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하늘보다 한 겹 더 짙은 회색이었다.

어머니는 침대보다 창가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었다. 그리고 그 의자 위, 어머니의 무릎이 내 자리였다. 환자복 위에 걸친 털실 카디건에서는 소독약 냄새가 났고, 그 밑으로 희미하게 어머니 냄새가 났다. 볕에 말린 빨래 같은, 바닷바람이 스친 머리카락 같은 냄새였다. 나는 그 냄새를 맡으려고 자꾸 어머니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어머니는 그때마다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는데, 그 손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손이 가볍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창밖에는 동백나무가 서 있었다. 병원을 짓기 전부터 거기 있었다는 늙은 나무였다. 반들반들한 잎사귀 사이로 붉은 꽃이 빼곡했다. 흰 눈 위에서 보니 그 붉은색은 거의 아플 만큼 선명했다.

"재우야, 동백꽃이 왜 떨어지는지 아니?"

어머니가 내 정수리에 턱을 괴고 물었다. 네 살배기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던 것 같다. 아니면 그저 어머니 품이 따뜻해서 가만히 있었던 것 같다. 둘 중 어느 쪽이었는지는 이제 확인할 길이 없다.

"다른 꽃들은 잎이 한 장씩 시들어서 떨어지잖아. 근데 동백은 안 그래. 제일 예쁠 때 통째로 떨어져."

어머니는 손가락으로 창유리를 짚었다. 손끝이 닿은 자리에 하얗게 김이 서렸다가 사라졌다.

"꽃이 지면서도 아름답게 지려고 그런대. 봐, 떨어져도 여전히 붉잖아."

눈 위에 떨어진 꽃들은 정말로 붉었다. 꽃잎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노란 꽃술을 위로 한 채, 누가 일부러 내려놓은 것처럼 놓여 있었다. 나무에 달린 꽃과 땅에 떨어진 꽃이 똑같이 붉어서, 어느 쪽이 살아 있는 꽃인지 나는 구별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나뭇가지 사이로 작은 새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참새보다도 작은 연두색 새였다. 눈 둘레에 하얀 테가 동그랗게 둘러져 있어서 꼭 놀란 얼굴 같았다. 새는 동백꽃 한가운데에 부리를 깊숙이 묻었다. 고개를 묻을 때마다 꽃이 조금씩 흔들렸다.

"동박새네."

어머니가 속삭였다. 새가 들을까 봐 조심하는 목소리였다.

"동백꽃 꿀을 먹으러 오는 새야. 겨울엔 벌도 나비도 없잖아. 그래서 동백은 저 새가 아니면 꽃가루를 옮겨 줄 데가 없대. 꿀을 먹으면서 이마에 노란 가루를 묻혀서, 다른 꽃으로 옮겨 주는 거야."

나는 새의 이마를 보았다. 정말로 연두색 깃털 위에 노란 가루가 묻어 있었다.

새가 머리를 빼는 순간, 꽃이 가지에서 떨어졌다. 툭. 새는 놀라 날아가지 않았다. 가지 끝에 앉은 채로 고개를 기울여 눈 위에 떨어진 꽃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잠깐이었다. 그러고는 옆 가지의 다른 꽃으로 폴짝 옮겨 앉아 다시 부리를 묻었다.

"새는 안 슬퍼?"

내가 물었다. 그건 기억한다. 어머니가 대답하기 전에 오래 웃었으니까.

"글쎄. 슬퍼도 배가 고프면 다른 꽃으로 가야지. 그래야 살지."

어머니는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겼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러다 손이 멈췄다.

"엄마가 없어도 우리 재우는 잘 지낼 수 있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아마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안다. 다만 거기 붙일 이름을 모를 뿐이다. 나는 대답 대신 어머니의 카디건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단추는 다섯 개였고, 그중 하나는 실이 풀려 덜렁거렸다.

창밖에서 또 하나의 동백이 떨어졌다. 소리 없이. 유리창 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텐데, 나는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툭, 하는 소리를 듣는다. 누군가의 머리가 떨어지는 것 같은, 둔하고 무거운 소리를.

어머니는 이듬해 동백이 다 지기 전에 돌아가셨다. 장례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내게 남은 건 그 창가와, 눈 위의 붉은 꽃과, 이마에 노란 가루를 묻힌 채 다른 꽃으로 옮겨 가던 작은 새뿐이다. 그리고 실이 풀려 덜렁거리던 단추 하나. 그 단추를 끝내 떼어 가지지 못한 것을, 나는 오래도록 후회했다.


어머니가 떠난 뒤 아버지는 형과 나를 데리고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갔다. 여수 구시가지, 바다 쪽으로 기울어진 비탈길 끝에 있는 오래된 일본식 가옥이었다. 검은 기와지붕에 미닫이 유리문,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툇마루. 할아버지는 그 집을 '적산가옥'이라고 불렀는데, 나는 오랫동안 그게 무슨 산 이름인 줄 알았다.

마당 한쪽에는 커다란 동백나무가 있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심었다고도 하고, 집보다 먼저 거기 있었다고도 했다. 어느 쪽이든 그 나무는 집의 어떤 기둥보다 늙어 보였다. 겨울이면 붉은 꽃이 피었다가 통째로 떨어졌다. 아침마다 마당에는 밤새 떨어진 꽃이 흩어져 있었다.

할머니는 그 꽃을 대빗자루로 쓸어 담으며 혀를 찼다.

"징그럽게 왜 이렇게 떨어지는지……."

쓸어 모은 꽃은 삼태기에 담겨 담장 밑에 버려졌다. 며칠이 지나면 꽃은 갈색으로 무르고, 그 위에 또 새 꽃이 쌓였다. 할머니는 그 나무를 베자는 말을 해마다 했고, 할아버지는 해마다 못 들은 척했다.

막내고모 수진은 그때 스무 살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수 바닷가의 수산물 가공공장에서 일했다. 새벽에 나가서 해가 지면 돌아왔는데, 돌아올 때면 몸에 생선 비린내가 배어 있었다. 할머니는 고모가 현관에 들어서기 무섭게 "씻어라, 씻어" 하고 등을 떠밀었다. 형은 코를 막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냄새가 싫지 않았다. 차가운 물과 소금과 은빛 비늘의 냄새. 어머니도 바닷가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고모 곁에 있으면 어머니의 무릎 위에서 맡던 냄새가 아주 조금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고모가 씻으러 들어가기 전에 일부러 고모의 다리에 매달렸다.

"아이고, 우리 재우는 비린내도 좋다네."

고모는 웃으며 나를 안아 올렸다. 고모의 손은 늘 빨갛게 터 있었다. 하루 종일 얼음물에 생선을 담갔다 뺐다 하는 손이었다. 그 손으로 고모는 내 볼을 꼬집고, 내 신발 끈을 묶어 주고, 마당에 떨어진 동백을 주워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재우야, 동백꽃 예쁘지?"

아직 붉고 싱싱한 꽃이었다.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생각보다 묵직했다. 꽃잎은 차가웠고 꽃술에서는 달큰한 냄새가 났다.

"근데 왜 떨어져요?"

나는 어머니에게 들었던 대답을 고모에게서 다시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고모는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겠어. 아마 무거워서 그런가?"

고모는 그렇게 말하고 혼자 웃었다. 나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아름답게 지려고, 같은 말보다 훨씬 덜 무서웠다. 무거우면 떨어진다. 그건 다섯 살짜리도 아는 일이었다.

고모가 울산으로 떠난 것은 내가 여섯 살 되던 해 겨울이었다. 울산에 큰 공장이 있는데, 기숙사도 주고 월급도 여수의 두 배라고 했다. 할머니는 반대했고 할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고모는 가방 두 개를 쌌다.

그날은 겨울비가 내렸다. 고모는 툇마루 끝에서 운동화 끈을 오래 묶었다. 마당의 동백이 비를 맞으며 떨어지고 있었다. 툭, 툭. 빗소리 사이로 그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재우 잘 있어. 고모 돈 많이 벌어서 올게."

고모는 우산을 쓰고 대문을 나섰다. 나는 미닫이 유리문에 이마를 대고 고모의 뒷모습이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보았다. 툭. 또 하나가 떨어졌다. 작별 인사처럼.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데리고 온 것은 그 이듬해 겨울이었다. 서울 사람이라고 했다. 하얀 코트를 입고 있었고,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동백나무를 올려다보며 손뼉을 쳤다.

"어머, 이게 그 유명한 동백이구나. 정말 붉네요."

그녀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그때 꽃 한 송이가 그녀의 구두 앞에 툭 떨어졌다. 그녀는 흠칫 뒤로 물러섰다.

"으, 좀 무섭네. 왜 이렇게 떨어지죠?"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그녀의 가방을 들고 먼저 툇마루로 올라갔다. 새어머니는 그 뒤로 다시는 동백나무 근처에 가지 않았다. 마당을 가로질러야 할 때면 일부러 담장 쪽으로 돌아서 걸었다.

형 재민이는 그 겨울부터 떨어진 동백을 발로 으깼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툇마루에 던져 놓고 마당으로 내려가, 꽃을 하나씩 운동화 뒤축으로 짓밟았다. 붉은 꽃잎이 진흙과 섞여 검붉은 얼룩이 되었다.

"형, 왜 그래?"

형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다음 꽃을 밟았다.

"그냥. 떨어진 건 죽은 거잖아."

나는 형의 운동화 밑창에 묻은 얼룩을 오래 보았다. 꼭 피 같았다. 그날 밤 나는 할머니 몰래 담장 밑 삼태기에서 아직 덜 시든 꽃 하나를 꺼내 베개 밑에 넣고 잤다. 아침에 보니 꽃은 눌려서 납작해져 있었다. 그래도 붉었다.


열다섯 살 겨울, 수진 고모가 돌아왔다.

울산으로 떠난 지 십 년 만이었다. 그동안 고모는 명절에 몇 번 내려왔을 뿐이었다. 올 때마다 조금씩 말라 있었고, 조금씩 말수가 줄어 있었다. 공장 이야기를 물으면 그냥 웃었다. 이번에는 가방이 하나였다. 그리고 고모는 걸어서 오지 않았다. 구급차를 타고 왔다.

백혈병이라고 했다. 울산의 큰 병원에서는 더 해 줄 것이 없다고 했고, 고모는 여수로 가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병원 복도에 주저앉아 울었다. 할아버지는 그 몇 해 전에 이미 돌아가셨으니, 고모를 업고 구급차에서 병실까지 옮긴 사람은 아버지였다.

여수 병원 침대에 누운 고모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게 고모라는 걸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고모는 창백했다. 동백꽃처럼, 이라고 쓰려다 그만둔다. 동백은 창백하지 않다. 그건 동백의 붉은빛이 모두 빠져나가고 하얗게 마른 꽃받침만 남은 얼굴이었다. 머리카락은 듬성듬성 빠져 있었고, 늘 터 있던 손은 이제 터질 살도 없이 가늘었다.

"재우 많이 컸네."

고모는 웃었다. 웃는 얼굴만은 그대로였다.

"키가 고모보다 크겠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대 난간을 붙잡고 서 있었다. 고모 몸에서는 이제 생선 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소독약 냄새만 났다. 그게 이상하게 서러웠다. 어머니의 병실에서 맡던 냄새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고모, 울산에도 동백 있어요?"

왜 그런 걸 물었는지 모르겠다. 고모는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공장에는 없어. 굴뚝만 있지. 그래서 겨울마다 여수 생각이 났어. 우리 마당 동백."

고모는 창밖을 보았다. 병실 창으로는 주차장과 건너편 건물의 회색 벽만 보였다.

"엄마는 아직도 그거 쓸어다 버리시나?"

"네. 징그럽다고."

고모는 소리 내어 웃다가 기침을 했다. 오래 했다.

고모는 그해 동백이 한창일 때 죽었다. 서른한 살이었다.

장례식장 빈소에 동백꽃이 놓여 있었다. 흰 국화 사이에 누군가 마당의 동백 가지를 꺾어 꽃병에 꽂아 둔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는데, 할머니였다. 평생 그 꽃을 징그럽다며 쓸어 버리던 할머니가, 새벽에 마당에 나가 꽃이 가장 많이 달린 가지를 골라 꺾었다고 했다.

하지만 꽃병에 꽂힌 동백도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툭, 툭. 흰 국화 사이로, 영정 앞 제단 위로. 조문객들은 그 소리에 한 번씩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육개장 그릇으로 고개를 숙였다. 꽃이 떨어질 때마다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 꼭 조문객들이 떠나는 발걸음 소리 같았다.

형은 빈소 바깥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형은 열아홉이었다. 교복 대신 검은 양복을 입은 형이 낯설었다. 나는 형 옆에 앉았다. 형이 나에게 담뱃갑을 내밀었다가 다시 거두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이 방황을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아니, 방황은 그전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 무렵부터 형은 집을 나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여수를 떠나 서울로 갔다가, 부산으로 갔다가, 다시 어딘가로 갔다. 무슨 일을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아버지는 묻지 않았고, 새어머니는 묻지 않는 아버지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형은 가끔, 아무 예고도 없이 돌아왔다. 대개 한밤중이었고 술 냄새가 진동했다. 형은 내 방 문을 열고 들어와 이불 끝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듬해 겨울의 어느 밤에도 그랬다. 형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보았다. 창밖은 마당이었고, 마당에는 동백이 떨어져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그 꽃들은 검게 보였다.

"재우야."

"응."

"넌 여기서 꼭 나가라."

형의 목소리는 술에 젖어 있었지만 눈은 이상하게 맑았다.

"동백 같은 놈이 되지 마."

"동백 같은 놈이 뭐야?"

형은 대답하기 전에 오래 웃었다.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게 어머니를 닮은 웃음이라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뿌리는 여기 있는데, 결국 떨어지는 놈."

형은 그 말을 하고 내 이불 위에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다. 나는 형의 운동화를 벗겨 주었다. 밑창에 검붉은 얼룩이 말라붙어 있었다. 그게 동백인지 다른 무엇인지, 나는 묻지 않았다.


스물다섯의 겨울, 나는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형의 말대로 나는 여수를 떠났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붙었고, 졸업하자마자 작은 회사에 들어갔다. 명절에도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내려가지 않는 해가 늘었다. 여수 말씨는 서울에 올라온 첫해에 버렸다. 버리고 나니 생각보다 쉬웠다.

아내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 결혼식장은 강남의 웨딩홀이었고, 신부 부케에는 하얀 장미와 안개꽃이 있었다. 동백은 없었다. 플로리스트가 겨울 부케에는 동백을 쓰기도 한다고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꽃이 통째로 떨어지면 어떡하느냐고 농담처럼 말했다. 아내는 웃었다.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식에 왔다. 형은 오지 않았다. 청첩장을 보낼 주소가 없었다.

형의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그해 십이월이었다. 여수에는 동백이 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재우야, 나 느그 형 친구 동철이. 기억나나?"

기억나지 않았지만 기억난다고 했다.

"형이 또 쓰러졌다. 이번엔 진짜 위험해 보여. 병원 가자 캐도 안 간다 하고."

또, 라는 말이 귀에 걸렸다. 나는 형이 그전에도 쓰러졌다는 걸 몰랐다.

나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기차를 탔다. 아내는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나는 말렸다. 아내는 임신 넉 달째였다. 여수엑스포역에 내리자 바닷바람이 얼굴을 쳤다. 짜고 축축한 바람. 십 년 가까이 잊고 있던 냄새였다.

형은 구시가지 뒷골목의 낡은 여인숙에 있었다. 간판의 '숙' 자에 불이 나가 있었다. 카운터의 노인은 내 얼굴을 보더니 말없이 2층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똑 닮았네"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문을 열자 쉰 냄새가 났다. 술과 담배와 오래 갈지 않은 이불 냄새. 형은 창가 쪽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뼈만 남은 몸이었다. 광대뼈가 살갗을 뚫고 나올 것 같았고, 초점 없는 눈이 한참 만에야 나를 찾았다.

"……재우가."

형은 웃으려다 말았다.

방 한구석, 소주병들 사이에 시든 동백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꽃잎 끝이 갈색으로 말려 있었지만 가운데는 아직 붉었다. 누가 일부러 놓아둔 것처럼 바닥에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형, 이게 뭐야?"

형은 꽃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엄마……. 무덤에서……. 주워 왔어……."

어머니의 무덤은 여수 외곽의 공원묘지에 있었다. 언제 누가 심었는지 모르는 동백나무 한 그루가 그 근처에 서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거기 간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형은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형을 부축해 일으켰다. 형은 가벼웠다. 어머니의 손처럼, 이상할 만큼 가벼웠다. 형의 팔을 내 어깨에 걸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나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서울 집에는 방이 두 개였다. 하나는 아기 방으로 꾸미는 중이었다. 아내는 입덧이 심했고 담배 냄새에 예민했다. 그리고 형은 언제든 툭, 떨어질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그 집에 들일 수는 없었다.

나는 택시 기사에게 역이 아니라 아버지 집 주소를 불렀다.

형은 택시 뒷자리에서 창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한 나를 나는 지금도 용서하지 못한다.

아버지 집의 미닫이 유리문은 여전히 삐걱거렸다. 할머니는 몇 해 전에 돌아가셨고, 마당은 오래 쓸지 않은 티가 났다. 아버지는 형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새어머니가 건넌방에 이불을 깔았다.

마당의 동백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붉은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형을 눕히고 마당으로 나왔을 때, 나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연두색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동박새였다. 새는 꽃에 부리를 묻고 있었다. 나는 새가 날아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대문을 나섰다.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에서 아내에게 문자를 보냈다. 형은 괜찮다고. 아버지가 돌봐 주신다고. 둘 다 거짓말이었다.


일주일 후, 형은 조용히 집을 나갔다.

새어머니가 전화로 알려 주었다. 아침에 건넌방 문을 열었더니 이불이 개어져 있더라고. 형이 이불 개는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이불은 모서리를 맞춰 반듯하게 개어져 있었다고 했다.

"그날 동백이 유난히 많이 떨어졌어."

새어머니가 말했다. 마당이 온통 붉은 꽃으로 덮여 있었다고. 형이 그 꽃들 사이로 걸어 나갔을 텐데, 밟힌 꽃이 하나도 없었다고. 새어머니가 그런 걸 보고 있었다는 게 이상했다. 그녀는 이십 년 동안 그 나무 근처에 가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는 찾아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찾지 않았다. 아내의 정기검진이 있었고, 연말 결산이 있었고, 형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떠돌다가 돌아오는 사람.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나는 믿기로 했다.

한 달 후, 여수 앞바다에서 형이 발견되었다.

경찰은 사고와 자살 둘 다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어느 쪽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전화로 그 말을 전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았다. 다만 말과 말 사이가 길었다.

"주머니에 동백이 하나 있었단다."

바닷물에 불어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여전히 붉었다고 했다.

나는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아내의 몸이 무겁다는 이유를 댔다. 아무도 따지지 않았다. 아버지도, 새어머니도, 동철이라는 형의 친구도. 그게 더 견디기 어려웠다.

발인 날, 나는 회사에 반차를 내고 동네 화원을 찾아갔다. 왜 그랬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형의 주머니에 있던 것과 같은 꽃을 한 번 손에 쥐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화원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동백은 잘 안 갖다 놔요. 찾는 사람도 없고."

"서울엔 동백이 없나요?"

"화분이면 몰라도 밖에서는 힘들어요. 남쪽 나무라. 여기 겨울은 너무 춥고 메말라서 얼어 죽어요."

나는 빈손으로 화원을 나왔다. 그날 서울에는 눈 대신 마른 바람이 불었다.

지금도 겨울이 오면 동백이 떠오른다.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어머니가 떨어지는 소리, 고모가 떨어지는 소리, 형이 떨어지는 소리. 그 소리는 언제나 유리창 너머에서 들린다. 나는 언제나 창 안쪽에 있다.

딸아이는 올해 일곱 살이 되었다. 아이는 동백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아이를 여수에 데려간 적이 없다. 아버지는 재작년에 돌아가셨고, 그 집은 팔렸다. 새 주인이 동백나무를 베었는지는 모른다. 묻지 않았다.

창밖은 온통 회색이다. 서울의 겨울은 동백이 필 수 없을 만큼 차갑고 메마르다. 하지만 나는 여기 있다. 형의 말대로 그곳을 나왔고, 뿌리를 내리지도 꽃을 피우지도 못하는 곳에 서 있다.

어쩌면 나도 동백이었는지 모른다. 언젠가는 툭, 통째로 떨어질. 하지만 적어도 붉지는 않을 것이다. 붉은빛은 이미 오래전에 어딘가 두고 왔으니까. 여인숙 계단에, 택시 뒷자리에, 가지 않은 장례식장 어딘가에.

어머니의 말이 떠오른다.

"꽃이 지면서도 아름답게 지려고 그런대."

어머니, 저는 아름답게 떨어질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미 떨어졌는데 그것조차 모르고 있는 걸까요.

가끔 그 작은 연두색 새를 떠올린다. 떨어진 꽃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다른 꽃으로 옮겨 가던 새. 슬퍼도 배가 고프면 다른 꽃으로 가야 한다고, 그래야 산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너무 잘 따랐다. 어머니가 떨어졌을 때도, 고모가 떨어졌을 때도, 형이 떨어졌을 때도, 나는 잠깐 내려다보고 다른 꽃으로 옮겨 갔다.

어쩌면 나는 동백이 아니라 그 새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동박새가 없으면 동백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했다. 꽃가루를 옮겨 줄 이가 없으니까. 나는 내가 무엇을 옮겼는지 모른다. 이마에 묻은 노란 가루가 어디에 닿았는지도. 다만 꿀이 없는 회색 도시에서, 더는 떨어질 꽃조차 없는 곳에서, 여전히 날개를 접지 못한 채 맴돌고 있을 뿐이다.

어젯밤 딸아이가 그림책을 들고 와 물었다. 눈 둘레가 하얀 연두색 새가 그려진 페이지였다.

"아빠, 이 새 이름이 뭐야?"

나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아이는 기다렸다.

"동박새."

내가 말했다.

"동백꽃 꿀을 먹으러 오는 새야."

말하고 나서야 알았다. 내 목소리가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새가 들을까 봐 조심하는,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