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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마곰 · 2026년 10월 15일

나는 그저 그런 대한민국 중소기업의 그저 그런 만년 부장 김정훈이다. 쉰이라는 나이는 참으로 기묘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어서, 삶의 중력은 무겁게 짓누르는데 정작 세상의 시선에서는 공기처럼 투명해지는 시기였다. 집에서 내 존재감은 식탁 구석에 일주일째 방치된 식빵에 핀 푸른 곰팡이보다 못한 퇴물이었고, 아내에게 나는 그저 숨 쉬는 소리가 유난히 거슬리는 대형 가전제품, 그것도 에너지 소비효율 등급이 최하위인 구형 모델에 불과했다. 어젯밤에도 거실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던 나에게 아내는 청소기를 발치에 툭툭 부딪치며 말했다.

"아유, 이 인간은 주말이나 평일이나 소파랑 한 몸이네. 차라리 공기청정기였으면 미세먼지라도 빨아들이지, 이건 산소만 축내고 이산화탄소만 뿜어내니 원."

자식들에게 나는 매월 25일, 즉 월급날에만 잠깐 반짝였다가 스러지는 반딧불이 같은 존재였다. 대학교에 다니는 큰아들과 고등학교 졸업반인 막내딸의 카카오톡 단톡방에서 내 이름이 불릴 때는 오직 두 가지 경우뿐이었다. '아빠, 이번 달 용돈 언제 들어와?' 혹은 '아빠, 학원비 결제 카드로 했어.' 그 외의 시간 동안 나는 가족이라는 화려한 연극 무대 뒤편에서 묵묵히 배경 막이나 당기는 무대 장치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하루의 절반 이상을 바치는 회사에서는 어땠을까. 슬프게도 이곳에서의 내 위상은 복합기 맨 아래 칸에 들어 있는 B-4 용지함의 마지막 한 장보다도 주목받지 못했다. 아무도 B-4 용지를 쓰지 않듯, 아무도 김 부장의 의견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결재 라인의 빈칸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고무도장, 상무님의 신경질적인 샤프심 세례를 받아내는 인간 방파제, 그리고 젊은 사원들이 메신저 뒷담화 방에서 안주 삼아 씹어대는 '라떼 부장님'이 바로 나였다.

그날 오후 세 시 십오 분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숨 막히게 무료하고 적당히 비참했다. 오전 내내 최 상무에게 '영업지원팀 3분기 품의서 양식의 줄 간격이 왜 160%가 아니라 155%냐, 김 부장은 눈알이 장식이냐'는 식의 인격 모독을 30분간 들은 뒤라 속이 쓰렸다. 위벽이 사포로 문지른 것처럼 까끌거렸다. 나는 터덜터덜 발을 끌어 사무실 구석에 자리 잡은 한 평 남짓한 탕비실로 기어들어 갔다.

형광등 하나가 수명을 다해가며 찌르르, 찌르르 신경질적인 소음을 내고 있었다. 나는 습관처럼 종이컵 하나를 뽑아 들고 노란색 믹스커피 봉지를 뜯었다. 정수기 온수 버튼을 누르자, 붉은 램프가 깜빡이며 뜨거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봉지 끝을 잡고 휘휘 저을 때마다 값싼 식물성 프림과 정제 설탕, 그리고 동결건조 커피 가루가 뒤섞이며 달짝지근하고 인공적인 향기가 좁은 탕비실을 메웠다.

"후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종이컵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뜨거운 액체가 혀끝에 닿는 순간이었다. 달고, 느끼하고, 끝맛이 미묘하게 텁텁한 이 화학적인 감칠맛. 매일 하루에 네 잔씩 마시던 그 지독히도 익숙한 싸구려 믹스커피의 맛이 미뢰를 강타하는 찰나, 내 뇌수 깊은 곳에서 거대한 댐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아앙—!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태초의 빅뱅 이후로 봉인되어 있던 초차원적 데이터의 해일이었다. 눈앞의 누렇게 바랜 탕비실 벽지가 순식간에 수조 개의 은하계가 회전하는 성운의 홀로그램으로 겹쳐 보였다. 정수기 물 떨어지는 소리가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에서 방출되는 호킹 복사음으로 변환되어 고막을 때렸다.

'이 맛은... 이 혀끝에 감도는 싸구려 비정질 규산염 프림과 합성 감미료의 황금 비율은...!'

종이컵을 쥔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기억났다.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복원되었다. 이 맛은 지구의 동서식품이나 남양유업 따위가 발명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제7천구 항성계 관리본부 전략기획실' 제3탕비실에 비치되어 있던 특제 보급품, '코스믹 믹스 스타더스트(초신성 로스팅 에디션)'의 맛과 분자 구조 단위로 일치했다!

그랬다. 나, 김정훈은 인간이 아니었다.

나는 신(神)이었다.

그것도 수염 기르고 구름 위에서 하프나 뜯는 한가한 신이 아니라, 전 우주의 인과율과 빅뱅 예산을 총괄하는 초거대 우주적 대기업에서 '존재 확률 매트릭스'와 '항성계 감가상각비' 따위를 11차원 엑셀 시트로 돌리던, 입사 45억 년 차 '만년 과장신(神)'이었다!

기억의 퍼즐이 맞춰지자 기가 막힌 전후 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지구 시간 기준), 나는 '전지적 관점 위원회'에 제출할 안드로메다 은하 통폐합 관련 분기 실적 보고서를 작성하다가 극심한 번아웃에 빠졌었다. 상사인 대천사장 미카엘 본부장의 끝없는 반려와 피드백 지옥. '김 과장, 이 은하계는 ROI(투자자본수익률)가 안 나오잖아. 생명체 진화 테크트리를 왜 이렇게 비효율적으로 짰어? 다시 해와.'라는 잔소리에 신물이 난 나머지, 나는 사내 인트라넷에서 가장 막 나가는 방식의 장기 근속 휴가를 신청했었다.

기억 소거 옵션을 포함한 [무의식 다이브형 인생 리프레시 휴가 패키지 - 코스명: K-직장인 하드코어 체험].

"허."

탕비실의 정적을 깨고 기가 막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친... 과거의 나 새끼, 제정신이냐?"

권태와 실적 압박을 피해 도망친 곳이 고작 대한민국 중소기업 영업지원팀 부장 자리라니! 낙원은 개뿔, 이건 휴가가 아니었다. 이건 그냥 우주 본사에서 실적 최하위 변방 자회사로, 그것도 가장 더러운 하청업체의 중간 관리직으로 자진 좌천되어 발령 난 것과 다름없었다. 45억 년 동안 우주 엑셀을 돌리던 놈이 쉬겠다고 와서는, 25년 동안 한글과컴퓨터랑 마이크로소프트 엑셀을 돌리며 최 상무 같은 미개한 탄소 생명체에게 결재판을 집어 던져지는 수모를 겪고 있었다니!

이 무슨 신적인 삽질이며, 범우주적 자해 행위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