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마곰 · 2026년 10월 15일
허탈감과 자괴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가슴을 쳤다. 나는 탕비실 싱크대 모서리를 잡고 몸부림치다, 나도 모르게 50년 치의 애환과 45억 년 치의 피로가 압축된 영혼의 한숨을 토해냈다.
"흐우우우우웁... 아아... 내 인생... 아니, 내 신생(神生)..."
그 순간이었다. 내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한숨에 미세한 신성력(Divine Power)이 실렸고, 그것이 고밀도 중력파 음파병기처럼 퍼져나가며 탕비실 일대의 시공간을 완전히 정지시켰다.
똑, 똑, 떨어지던 정수기 물방울이 허공에 보석처럼 얼어붙었다. 찌르르거리며 깜빡이던 형광등의 불빛 입자가 공기 중에 고정되었고, 탕비실 문밖으로 지나가던 박 대리가 한쪽 발을 든 채 박제된 듯 멈춰 섰다. 절대 영도의 정적이 찾아온 회색빛 세계 속에서, 오직 내 망막 한가운데에 눈부신 황금빛 홀로그램 인터페이스가 부팅되기 시작했다.
[시스템 알림: 생체 자아 코드 일치 확인. 제7천구 전략기획실 김정훈(고유번호: GOD-7749-KR) 과장님의 개인 계정이 50년(지구 주기도 기준) 만에 재활성화되었습니다.]
[미확인 메시지가 1,492,038,112통 있습니다.]
띠링! 띠리링! 띠리리리링—!
경쾌하다 못해 광기 어린 알림음과 함께, 50년 묵은 내 신(神) 이메일 계정과 사내 메신저 팝업창이 시야를 가득 메우며 미친 듯이 증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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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신저 알림] '제3기 타락천사 동기회' 그룹채팅방의 루시퍼 님이 회원님을 1,004번 호출했습니다. (미리보기: 야 김 과장, 너 지구로 잠수 탔다며? 지옥 불구덩이 외주 용역비 결재 안 해주고 튀면 어떡하냐? 읽씹하지 마라 진짜;;)
[인사팀 공지] 제882회 전 우주 산업안전보건교육 미이수자 명단 공지 (김정훈 과장 외 3신)
[긴급/독촉] 4/4분기 인과율 예산 정산서 최종 결재 요망 (지연 일수: 18,262일)
"아오, 지긋지긋한 스팸 새끼들... 루시퍼 이 미친놈은 아직도 단톡방 파서 술 마시자고 난리네."
나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신성 감각으로 허공에 손을 휘저어 스팸 창들을 쓰레기통 아이콘으로 쓸어 담았다. 그러다 시야 가장자리에 핏빛처럼 붉은 테두리로 번쩍이며 점멸하는 마지막 팝업창 하나에 손가락이 딱 멈췄다. 발신자 직인에는 무시무시한 해골과 천칭이 그려진 '우주 구조조정 위원회'의 마크가 찍혀 있었다.
[긴급/대외비] 우주 부실자산 청산 관련 현장 대면 보고 요청
- 안건: 프로젝트 KR-01 (코드명: 푸른 구슬 지구, 세부 구역: 대한민국) 정리해고 및 강제 청산 최종 통보의 건
- 일시: 현지 시각 금일 21:00 정각 (시간 엄수, 지각 시 시말서 징구)
- 장소: 피보고자 현재 근무지 빌딩 옥상 (※ 옥상 난간이 노후화되어 위험하오니 추락 등 안전사고에 각별히 유의 바랍니다)
- 드레스코드: 비즈니스 캐주얼 (3차원 육체 실체 혹은 7차원 아스트랄 비실체 모두 가능하나, 슬리퍼 착용 엄금)
- 발신: 본사 감사실 산하 우주 구조조정 위원회 제4기동감사반
- 회신(RSVP): [참석] / [불참(사유서 500장 제출)] / [자진 존재 소멸 예정]
"아..."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컵을 구기며 이마를 짚었다.
맞다. 지금 본사 기준으로 우주력 연말 성과감사 시즌이었다. 신들의 직장이나 인간들의 쥐꼬리만 한 중소기업이나, 감사 시즌은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이자 대재앙이었다. 게다가 내가 휴가 떠나기 직전에 기안 올렸던 프로젝트가 바로 이 '지구(특히 한국 지부)'의 자생적 문명 발전 모델이었는데, 내가 50년 동안 무의식 상태로 손 놓고 있는 사이 KPI(핵심성과지표)가 바닥을 친 모양이었다.
출산율 박살, 행복지수 나락, 자살률 1위, 거기에 부동산 영끌과 코인 광풍까지. 본사 감사실 눈에는 이곳이 당장 폐업 처리하고 초기 포맷(소행성 충돌 또는 대홍수)을 돌려야 할 완벽한 부실 자회사로 보일 터였다.
"하아... 쉬러 왔다가 폐업 정리해고 통보서를 받게 생겼네."
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허공의 [참석] 버튼을 눌렀다. 띡- 소리와 함께 홀로그램 창이 닫히고, 탕비실의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정수기 물방울이 똑 떨어지고, 문밖의 박 대리가 하품을 하며 지나갔다.
나는 식어버린 믹스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입안 가득 씁쓸하고 텁텁한 현실의 맛이 퍼졌다.
*
오후 아홉 시를 향해 가는 시간, 회사는 거대한 무덤처럼 조용했다. 칼퇴근을 생명처럼 여기는 사원들과 대리들은 여섯 시 정각이 되자마자 빛의 속도로 증발했고, 최 상무는 거래처 접대라는 명목으로 일찌감치 강남의 어느 고급 일식집으로 향했다. 텅 빈 사무실에 홀로 남아 모니터 불빛만 마주하고 있는 것은 나뿐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후 세 시부터 지금까지 모니터에 띄워놓은 똑같은 엑셀 시트만 멍하니 노려보고 있었다.
시계 초침이 아홉 시 정각을 5분 남겨두고 있었다. 나는 뻐근한 목을 좌우로 꺾으며 우두둑 소리를 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겨진 와이셔츠 자락을 바지춤에 쑤셔 넣고, 의자 등받이에 걸어두었던 낡은 남색 양복 마이(재킷)를 걸쳤다. 드레스코드가 비즈니스 캐주얼이라고 했으니, 넥타이는 살짝 풀어헤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비상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내 발걸음은 부도 직전의 어음을 막지 못해 채권단에게 불려 가는 망한 자회사 대표의 심정, 딱 그 자체였다. 계단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은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저 무수한 불빛 하나하나가 다 대출 이자와 카드값, 그리고 내일 아침 출근의 공포로 타오르는 인간들의 영혼이라는 걸 알기에 더더욱 서글펐다.
끼이이익— 철컥.
녹슨 철문을 밀고 빌딩 옥상으로 나서자, 10월의 서늘한 밤바람이 이마의 식은땀을 훑고 지나갔다. 옥상 바닥에는 방수 페인트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었고, 구석에는 담배꽁초가 수북이 담긴 플라스틱 화분 받침대가 굴러다녔다.
그리고 그 초라한 옥상 한가운데, 난간을 등지고 세 명의 사내가 일렬로 서 있었다.
그들은 밤하늘의 어둠을 그대로 오려내어 재단한 듯한 칠흑 같은 블랙 수트를 입고 있었다. 구김 하나 없는 완벽한 핏,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에나멜 구두. 하지만 가장 기괴한 것은 그들의 얼굴이었다. 눈, 코,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 피부가 없었고, 대신 창백한 백색 발광 다이오드 화면 같은 평면 위에 끊임없이 재조합되며 꿈틀거리는 거대한 QR코드가 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