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마곰 · 2026년 10월 15일
얼굴 대신 QR코드를 단 세 사내. 본사 감사실 특무대 요원들의 전형적인 위장 복식이었다. 익명성을 보장하고 피감사자의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내가 다가서자, 가운데 서 있던 가장 키가 큰 감사관의 얼굴 QR코드가 한 번 번쩍이더니 기계적이면서도 뇌에 직접 꽂히는 텔레파시 음성을 송출했다.
<피보고자 확인. 제7천구 전략기획실 소속 김정훈 과장. 현 지구 지부 임시 관리자.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관님들. 차라도 한잔 대접해야 하는데, 저희 지부가 워낙 영세해서 탕비실에 맥심 모카골드밖에 없네요."
나는 25년간 갈고닦은 K-직장인의 비굴하면서도 능청스러운 미소를 장착하며 고개를 까딱 숙였다. 우측에 서 있던 감사관이 손목시계를 한 번 보더니 허공에서 검은색 클립보드를 꺼내 들었다.
<농담은 생략하십시오. 시간당 차원 이동 출장비가 얼마나 비싼지 아실 텐데요.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김정훈 관리자, 귀하가 기획하고 방치한 '프로젝트 KR-01'에 대한 본사 감사 결과를 통보합니다.>
가운데 감사관의 QR코드가 붉은빛으로 변하며 날카로운 전자음을 냈다.
<첫째, 심각한 직무유기. 관리자는 휴가계를 핑계로 무려 반세기 동안 자아를 봉인한 채 본사 보고를 누락했습니다. 둘째, 처참한 성과 부진. 본 행성, 특히 귀하가 직접 거주 중인 한반도 섹터의 생명체들은 현재 '생존 의지 지표'와 '번식률'이 우주 평균치의 0.004% 수준으로 추락했습니다. 개체들은 매일 아침 지옥철이라는 압축 컨테이너에 실려 이동하며 만성적인 영혼 마모를 겪고 있으며, 자살률과 우울증 수치는 임계점을 돌파했습니다.>
좌측 감사관이 클립보드를 탁 닫으며 최종 선고를 내렸다.
<결론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유지 보수 비용 대비 산출되는 긍정적 카르마(업보)가 마이너스 상태입니다. 따라서 우주 구조조정 위원회는 금일 21시 15분부로 본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없던 일'로 처리하고, 해당 행성계를 포맷하여 암흑물질 채굴장으로 용도 변경하기로 의결했습니다. 관리자께서는 여기에 서명하시고 본사로 복귀해 대기발령을 받으십시오. 이 결정이 모두에게 이득입니다.>
내 눈앞으로 전자 서명 패드가 둥둥 떠올랐다. 서명란 아래에는 [동의 및 행성 폭파 승인]이라는 문구가 선명했다.
나는 서명 패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저 버튼 하나만 누르면 끝난다. 지긋지긋한 최 상무의 잔소리도, 매달 숨통을 조여오는 아파트 담보대출 원리금 상환 알림도, 소파에서 산소만 축낸다는 아내의 구박도, 월급날에만 반짝이는 자식들의 얄미운 카톡도 전부 한 줌의 우주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나는 다시 7차원 본사의 쾌적한 오피스로 돌아가 에어컨 바람을 쐬며 칼퇴근을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머릿속에 오늘 아침 현관을 나설 때 아내가 무심하게 던진 말이 떠올랐다. "여보, 오늘 저녁에 비 온대. 신발장 옆에 있는 파란 우산 챙겨 가. 또 술 마시고 잃어버리지 말고."
큰아들이 지난주에 알바 첫 월급을 탔다며 식탁 위에 슬그머니 올려놓고 간 삼만 원짜리 마트 상품권이 떠올랐다. 막내딸이 독서실에서 돌아오며 내 구두가 낡았다고 구두약을 발라놓았던 그 서툰 손길이 떠올랐다. 심지어 오늘 오후에 나한테 깨지고도 탕비실에서 몰래 내 몫의 비타민 음료를 챙겨주던 신입 사원 이 씨의 어색한 미소까지.
이게 부실 자산이라고? ROI가 안 나오는 실패작이라고?
"하..."
나는 서명 패드를 손등으로 툭 쳐서 옆으로 밀어냈다.
<관리자? 지금 무엇을 하는 겁니까? 서명을 거부하면 강제 집행 절차에 돌입합니다.>
"야, 감사실 꼰대들아."
내가 양복 마이 단추를 풀며 삐딱하게 섰다. 세 감사관의 얼굴 QR코드가 동시에 물음표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니들이 책상머리에 앉아서 계산기만 두들기니까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쥐뿔도 모르지? 여기 애들이 왜 출산율이 낮고 왜 우울한지 알아? 그 악조건 속에서도 하루하루 살아내려고 아등바등 버티고 있으니까 그런 거야, 이 새끼들아! 우주 본사 정규직인 니들이 매달 25일 카드값 막으려고 마이너스 통장 뚫어본 심정을 아냐고!"
<자아 동화 현상이 심각하군요. 현지 탄소 생명체의 열등한 감정에 오염되었습니다.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즉시 관리자의 임시 육체를 강제 해체하고 행성 포맷을 강행합니다.>
세 감사관이 동시에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들의 손끝에서 우주의 심연보다도 어둡고 차가운 보랏빛 에너지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피감사자의 정신을 단번에 붕괴시키는 감사실 특유의 권능, '절대 절망의 파동'이었다!
쿠구구구궁—!
검은 에너지가 내 머릿속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그 에너지는 내 뇌의 방어 기제와 충돌하며 지극히 한국적이고 직장인스러운 최악의 트라우마들로 실체화되어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귓가에서 '대표님 보고 마감 1분 전, 복합기 내부 깊숙한 곳에서 A4 용지가 아코디언처럼 구겨지며 걸리는 끔찍한 기계음'이 돌비 서라운드로 울려 퍼졌다! 눈앞에는 '전 사원 전체 회신(Reply All)으로 날아온 최 상무의 붉은색 궁서체 오타 지적 및 시말서 제출 명령 메일'이 수천 장의 부적처럼 날아와 시야를 가렸다! 뒤이어 심장을 쥐어짜는 '금요일 밤 11시, 3차 회식 자리 노래방에서 상무님이 내 손에 마이크를 쥐여주며 어서 트로트를 부르라고 강요할 때 흘러나오는 뽕짝 반주 소리'가 내 영혼의 고막을 찢어발겼다!
띠리리리링~ 쿵짝, 쿵짝, 쿵짜자 쿵짝—!
"크윽...!"
무릎이 살짝 꺾였다. 정교하고 악랄한 공격이었다. 웬만한 하급 신이었다면 이 시점에서 자아를 잃고 거품을 물며 아스트랄체로 분해되었을 것이다. 감사관들이 승리를 확신한 듯 팔을 내렸다.
<끝났나. 의외로 싱겁군.>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덜덜 떨리는 무릎에 힘을 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입가에는 피 대신 기묘하고도 서늘한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풋... 크하하하하!"
나는 가슴팍을 팡팡 두드리며 그 정신 오염 공격들을 온몸으로 씹어 삼켰다.
"야, 겨우 이 정도 고통으로 날 무너뜨리겠다고? 용지 걸리는 소리? 상무의 전체 메일? 노래방 탬버린? 하! 나는 그걸 25년 동안 매일 겪으면서도 대출 이자 한 번 안 밀리고 버텨낸 대한민국 중소기업 부장이다, 이 햇병아리 새끼들아!"
<뭐, 뭐라고?! 정신 공격이 전혀 먹히지 않고 있어! 저 관리자의 멘탈 방어력이 왜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높은 거지?!>
당황한 감사관들의 QR코드에 노이즈가 자글거렸다. 나는 넥타이를 완전히 풀어 손에 칭칭 감아쥐고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내 온몸에서 황금빛 신성력이 아니라, 25년 근속 K-직장인의 시커멓고 끈적끈적한 '생활의 독기(毒氣)'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