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마곰 · 2026년 10월 15일
쏴아아아—
다시 찾아온 옥상의 정적 속으로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왔다. 손에 쥐고 있던 법인카드를 지갑에 다시 넣는데,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오랜만에 신성력을 무리하게 끌어다 쓴 탓인지 뒷목이 뻐근하고 당(糖)이 급격히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허공에 마지막 시스템 메시지 창 하나가 조용히 떠올랐다.
[알림: 현장 감사반의 작전 실패 및 전원 리타이어로 인해, '프로젝트 KR-01'에 대한 강제 청산 집행이 무기한 보류되었습니다. 본사 감사실은 귀하의 강력한 프로젝트 사수 의지를 확인하였으며, 차기 정기 감사(지구 시간 기준 약 50년 뒤)까지 프로젝트의 정상 종료 및 자율 구조조정 권한을 김정훈 관리자에게 일임합니다.]
메시지 창이 파르르 떨리더니 연기처럼 사라졌다.
혼자 남은 옥상에서, 나는 천천히 난간 쪽으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빽빽한 아파트 단지들이 바둑판처럼 늘어서 있고,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 위로는 퇴근하지 못한 차량들의 붉은 브레이크 등이 핏줄처럼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저 안 어딘가에 내 집이 있고, 내 아내가 드라마를 보며 귤을 까먹고 있을 것이며, 내 자식들이 내일을 위해 책상 앞에서 씨름하고 있을 것이다.
50년 전, 나는 도망치듯 이곳으로 왔다. 본사의 실적 압박이 싫어서, 영겁의 시간 동안 반복되는 권태가 지겨워서 기억을 지우고 이 작은 행성의 평범한 인간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삶을 실패한 좌천이자 끔찍한 유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저 검은 양복 놈들이 내 삶을, 내 가족을, 그리고 내가 50년 동안 구르며 버텨온 이 거지 같지만 치열한 터전을 '없던 일'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 내 안의 신성(神性)보다 먼저 반응한 것은 다름 아닌 '인간 김정훈'의 오기였다.
"그래. 도망은 끝났다."
나는 난간을 두 손으로 꽉 쥐었다. 차가운 철제의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선명하게 전해졌다.
"이 프로젝트, 어차피 내가 기안 올려서 시작한 거다. 본사 감사실 놈들 손에 강제 폐업 당할 바에야, 내 손으로 끝까지 책임지고 '정상 종료' 시킨다."
회피나 중도 포기는 없다. 자진 소멸 따위는 더더욱 없다. 신으로서의 권능을 치트키처럼 써서 로또에 당첨되거나 하루아침에 재벌이 되는 얄팍한 꼼수도 쓰지 않을 작정이다. 그러면 본사 놈들이 '시스템 불법 조작'으로 또 꼬투리를 잡을 테니까.
나는 이 지긋지긋하고도 눈물겹도록 생생한 대한민국 가장의 현실을, 정해진 룰 안에서 끝까지 꾸역꾸역 살아낼 것이다. 그리하여 먼 훗날 이 육체의 수명이 다해 본사로 복귀하는 날, 대천사장 미카엘과 감사실 놈들의 코앞에 우주 역사상 가장 완벽하고 흠잡을 데 없는 '인생 프로젝트 최종 인수인계서 및 완료 보고서'를 딱 던져주고 말겠다.
나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작은 수첩과 볼펜을 꺼냈다. 그리고 달빛에 의지해, 앞으로 내가 완수해야 할 프로젝트 KR-01의 핵심 마일스톤(Milestone)과 세부 KPI를 또박또박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1차 목표 (단기 과제): 30년 만기 아파트 담보대출 잔금 전액 완납. (은행 이자로 나가는 카르마 누수 완전 차단)
- 2차 목표 (중기 과제): 큰아들과 막내딸 무사히 취업시키고, 본인들이 원한다면 결혼시켜 깔끔하게 분가시키기. (독립 객체로서의 서버 분리 작업 완료)
- 최종 목표 (장기 핵심 과제): 평생 내 투정 받아주며 고생한 내 아내보다, 딱 하루만 더 늦게 죽기. (홀로 남겨질 반려자의 외로움이라는 치명적 버그를 원천 방지하고, 장례 절차까지 내 손으로 마무리한 뒤 서버 종료할 것)
- 히든 과제 (개인 보상 퀘스트): 최 상무 그 인간 정년퇴직하는 날, 송별회 핑계 대고 오늘 소환했던 그 한우 투 플러스 꽃등심 집 가서 내 법인카드로 한도 끝까지 긁어 배 터지게 사 먹기.
수첩을 덮어 주머니에 넣자, 가슴속을 답답하게 짓누르던 체증이 씻은 듯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띠링—!
그때, 바지 주머니 속에서 신들의 홀로그램이 아닌, 진짜 내 스마트폰이 울렸다. 꺼내어 화면을 보니 아내에게서 온 카카오톡 메시지였다.
[마누라]: 어디야? 아직도 회사야? 비 온다니까 우산 챙겼어? 오는 길에 두부 한 모만 사 와. 김치찌개 끓여놨어. 빨리 와.
나는 스마트폰 화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다가, 25년 차 직장인의 가짜 미소가 아닌, 진짜 김정훈의 따뜻하고 조금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나]: 어, 이제 막 끝났어. 지금 출발해. 국산 콩 두부로 사 갈게. 금방 가.
답장을 보내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풀어헤쳤던 넥타이를 다시 단정하게 매고, 구겨진 양복 깃을 툭툭 털어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신은 퇴근하고 싶었다. 정말이지 죽도록 퇴근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집에 따뜻한 김치찌개가 끓고 있고, 내가 사 가야 할 두부 한 모가 마트 진열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자, 그럼... 퇴근해 볼까."
이 빌어먹을, 그러나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완수하기 위해, 만년 과장신이자 대한민국 김 부장인 나는 힘찬 발걸음으로 옥상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